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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용서하여라(마태 18,21-35 (가))
08/14/23  

모 본당에 외아들을 두고 있는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외아들은 3대 독자였으며, 노부부에게는 희망이요, 삶의 의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외아들은 젊은 운전사가 운전하던 트럭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사고의 책임은 전적으로 과속 운전한 운전사에게 있었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노부부를 위로했으며, 동시에 운전사에게는 저주와 욕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노부부는 커다란 슬픔 중에도 오히려 젊은 운전사의 장래를 걱정하였고, 또 경찰과 법원에 운전사를 용서해 줄 것을 탄원하였으며 그 운전사를 자기의 아들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운전사는 자기의 과오를 뉘우쳤고, 주위의 사람은 노부부의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특히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을 가지고서도 실천하기 힘든 것임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용서하라는 가르침은 모든 이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타인을 용서해 주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심으로써 용서의 중요성을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원수를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으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는 동태복수법이 성행하던 시대에 일곱 번 정도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의 일흔 번은 글자 그대로 사백구십 번이 아닌 무한히 용서하라는 내용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채무자의 비유를 들어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 용서받을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 우리가 용서받는 조건은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정신입니다.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증오심을 굳어 버리게 하는 것이며 증오심은 형제를 미워하는 격렬한 감정의 한 형태로서, 과격한 행위를 일으키며, 그 자체가 파괴적이며, 이런 증오심은 바로 사탄의 것입니다.
성 요한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1요한 3,15)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것만큼 용서받기를 바라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고, 조롱하고, 모욕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생활에서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순전히 공상이 아닌, 우리 모두가 지켜야만 할 계명이기에 우리 모두는 힘껏 노력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흔히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남이 나에게 끼친 해에는 극도로 민감하나, 우리 자신이 타인에게 저지른 과오나 더 나아가 하느님께 매 순간 죄짓고 또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는 잘 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웃과 하느님께 더 심각한 해를 끼쳤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또 하느님께 용서받고 있다는 신앙으로 우리가 남에게 받은 피해를 용서해 주도록 노력합시다.

우리가 누군가에 피해를 받아 분노가 우리 마음을 휩싸고 있을 때에 화해하기를 힘써 노력합시다. 주님께서는 화해를 빨리 해야 할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4). 혹시 우리는 먼저 화해를 청하기보다는 화해를 청하여 온 우리의 형제를 저버린 일은 없습니까?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에 우리는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고, 그분과 같아질 것이며, 더 순수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병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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