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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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리스트
04/01/24  

국민학교 시절 일기장 한편에 싫어하는 아이들 이름을 적었었다. 블랙리스트, 데스노트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일기장 검사를 하는 선생님께서 봐주시길 원했던 것 같다.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 말 안 듣는 아이들을 고자질하는 차원이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 이름을 더 많이 적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 생일 파티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 등등 내 일기장에는 다양한 리스트들이 존재했다.

좋아하는 노래들을 테이프, CD, MP3, 아이팟, 유튜브, 애플뮤직 플레이리스트에 모아 정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 이 노래 좋아. 이 노래도 빠지면 안 되지. 이건 아침에 커피 한 잔 하면서 듣기 좋은 노래잖아? 이건 내가 사랑에 아파할 때 들으며 눈물 흘렸던 곡이네. 이건 차 안에서 들으면 좋은 곡이지. 오, 이건 청소할 때, 이건 손님 왔을 때' 이렇게 혼자 신이 나서 좋아하는 노래들을 모아놓으면 부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풍요로웠다. 

노래방에서 노래하는 것이 최고의 놀이였던 시절엔 노래방에서 부를 노래 목록을 수첩에 적어놓고 다녔다. 분위기 띄울 때 부르는 노래, 컨디션 좋을 때 부르는 노래, 조용히 편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 등등 카테고리별로 정리가 되어 있어서 노래방에서 내 차례가 왔을 때 부를 노래가 생각나지 않으면 수첩을 들쳐보곤 했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이후에는 더 많은 리스트들이 생겨났다. 아이들 준비물, 아이들 스케줄, 각종 이벤트 등 리스트가 넘쳐났다. 그중 내가 가장 공들인 리스트가 있었는데 일종의 우리 가족 블루프린트 같은 것이었다. 2010, 2011, 2012 이렇게 연도를 쭉 적고 그 밑에 아이들의 나이와 내 나이를 적고 큼직큼직한 계획들을 적어 넣었다. 아이들의 초중고 입학과 졸업, 결혼 10주년, 20주년, 30주년, 부모님 환갑, 칠순, 팔순, 막내가 대학 갈 때 내 나이를 보며 흠칫 놀라기도 했다. 할 일 없고 심심할 때 이 수첩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우리에게 펼쳐질 인생이 기대되어 마음이 설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 그 리스트들을 정리해 보자.

1. 어릴 적 일기장 데스노트 속 친구들을 왜 싫어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들 잘 살고 있겠지.
2. 제일 좋아하는 노래들로만 만들어진 플레이리스트도 가끔은 별로 듣고 싶지 않다. 좋아하는 노래라고 언제든지 반가운 것은 아니다. 반면 가끔씩 정말 싫어했던 노래가 동네 호프집에서 흘러나오는데 갑자기 너무 정겹고 듣기 좋을 때도 있다.
3. 한창때 즐겨 부르던 노래방 18 번들은 이젠 절대 부르지 않는 곡들이 되어버렸다. 이런 노래를 전에는 대체 어떻게 불렀지? 이젠 고음이 안 올라가고 숨이 차서 못 부르는 노래들이 수두룩하다. 마지막으로 목청 높여 노래를 열창했던 것이 언제였던가? 최근에는 노래 자체를 거의 잘 부르지 않게 된 것 같다.
4. 우리 집 블루프린트는 다시 열어보지 못했다. 열세 살에 멈춰버린 첫째가 빠진 블루프린트를 들여다볼 용기가 아직은 나지 않는다.

삼 년 전 아들이 하늘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좋아했던 것들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세월에는 장사 없다고 내 기억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자신이 없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것들이라도 오래오래 기억해주고 싶었다. 포켓몬카드, 베이블레이드, 레고, 돌, 조개, 별자리, 모래사장, 해물 많은 짬뽕, 치즈피자, 갈비탕 당면, 야채 뺀 데리버거, 포카리스웨이트, 맥엔치즈, 치즈 파스타, 아차산 할아버지 순두부, 된장찌개에 들어간 감자와 두부, 게임, 유튜브, 틱톡, 영상편집... 나열하다가 왠지 서글퍼지기도 했다. 분명 이것보다 많을 텐데... 내가 모르는 것들,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들도 있을 텐데... 표현하지 못한 것도 숨겨둔 것들도 있었을 텐데... 아들의 Favorite 최애 목록은 나의 눈물 리스트가 되어버렸다.

리스트 하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오늘도 뜬금없이 이런 걸 리스트하고 있다. 아마도 살아있는 동안은 쭉 이렇게 리스트를 만들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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