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나이 듦
03/11/24  

언제부턴가 지인 부모님들의 부고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부모 부고였는데 어느덧 부모 차례가 되었다. 내가 그만큼 나이 들어간다는 뜻일 것이다. 연말에 해외에 사는 친구 아버님이 췌장암 치료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셨는데 치료 불가 소견을 듣고 한 달이 조금 지난 지난달 작고하셨다. 췌장암 판정을 받고 두 달 만에 맞이한 이별이었다. 

그래서인가 언제부턴가 매년 찾아오는 부모님 생신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나의 부모가 나이 들어가는 것은 왠지 불안하고 불편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아이들이 생일 카드에 쓴다며 "할머니 몇 살이셔?" 하는데 나이를 따져보다가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일찌감치 결혼하신 부모님 덕분에 어릴 적 나의 큰 자랑은 젊고 활기찬 부모를 둔 것이었다.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학교 교무실에 잠깐 다녀가시면 담임 선생님뿐 아니라 다른 과목 선생님들까지 "너네 아버지 정말 젊고 멋지시다"라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었고 나는 그게 좋았다. 

부모님이 중고등학생이었던 오빠와 나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오셨을 때가 지금의 나보다도 대여섯 살은 젊으셨을 때이다. 그 시절 내 눈에 부모님은 나이 든 중년 아저씨, 아줌마였는데(지금 우리 아이들 눈에 내가 그렇겠지) 눈 깜짝할 사이에 세월이 흘러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 그때 부모님이 굉장히 젊은 나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부모는 나에게 세상이었다. 부모를 거울삼아 내 미래를 설계했고 부모와 부딪히며 내 자아를 찾았다. 

나의 산이고 바다고 큰 세상이었던 부모가 나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쓸쓸하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이다. 아직 심각한 지병으로 병원을 드나들지 않으시더라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걸음걸이, 체형과 말투 등이 보일 때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자식을 낳고 돌보던 부모는 어느덧 나이가 들어 점점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리고 늘 주기만 하던 부모가 더 이상 자식에게 내어줄 것이 없게 되면 "오래 살아서 뭐 하냐, 자식들에게 피해 주지 말아야지, 이제 얼마나 더 살겠냐"와 같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다른 노인들이 내 앞에서 이런 푸념을 늘어놓으면 얼마든지 맞장구치며 받아줄 수 있지만 내 부모가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 버린다. 

<미움받을 용기>를 쓴 심리학의 대가 기시미 이치로의 부모님 간병기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에서 이치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자의 제안은 부모의 나이 듦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때 한 번쯤 새겨보면 좋을 내용들이다. 

"생산성으로 인간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뭔가를 달성하는 것, 생산적인 것만을 유일한 가치로 믿으며 살아온 사람은 나이가 들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사실을 비참하게 여깁니다. (중략)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부모자식 관계에서도 '자식' 혹은 '부모'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아무런 일이 없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는 가족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러다 가족 중 누군가 병이 나거나 사고가 생기면, 그제야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결코 당연한 게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 후에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갈 존재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평생 스물여섯쯤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던 나도 이미 마흔 중반을 넘어왔다. 태어난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 순서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 누구도 피해 갈 순 없다. 이렇게 죽음이 삶의 일부이고 삶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죽음이 이토록 두려운 까닭은 죽음 이후에는 함께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살아있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 함께하고 원 없이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은 가끔 잊고 사는 것만 같다. 더 많이 함께해야지! 더 많이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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