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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02/26/24  

선배가 자택으로 초청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이다. 선배의 아파트는 그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러 크기의 그림들이 방과 거실 여기 저기 잘 정돈되어 있었고, 벽에도 많은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선배는 어려서 고향을 떠나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도 본인이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건축사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석사 학위를 두 개나 받았고, 계속 같은 분야에서 일했다. 은퇴 후에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다. 선배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불편해 했으나 내 목소리가 워낙 커서 나름 그 불편을 줄여 줄 수 있었다.

선배와 마지막 만난 것은 한국에서 작년 여름이었고, 그 전 만남은 작년 이맘때 선배 자택에서였다. 당시 우리는 선배 자택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뷔페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함께했다. 헤어지면서 다음에 만나면 근처에서 월남국수를 먹기로 했었다. 그래서 이번 만남에서 당연히 월남국수를 함께 먹을 줄 알았는데 선배는 네 가지 초이스가 있다고 했다.

그 네 가지의 마지막이 인스턴트 떡국이었다. 선배는 비도 오고 하니 집에서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럼 왜 네 가지 초이스가 있다는 말을 했던 걸까? 내가 '월남국수' 얘기를 하니 본인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면서 내 얘기를 듣고 기억난다고 했다.

선배는 떡국을 먹으면서 “내가 이런 재능을 갖게 된 게 다 조상들 덕분이다. 아버님이 커다란 배를 설계 하는 모습을 어려서 보았다”고 말했다. 또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설계하고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이 당신의 선조라고 했다. 그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며 그 훌륭한 조상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상의 빛난 얼이 선배에 의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선배는 거의 일 년에 한 번은 고향을 방문한다고 했다. 어려서 떠난 고향을 찾아가는 이유를 묻자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자꾸 찾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보니 선배가 그린 작품의 상당수가 고향 바다와 산천, 그리고 논밭과 집들이었다.

선배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고학시절 얘기부터 작품과 조상, 그리고 고향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선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미국을 참 좋아했다. 그 시대를 살던 많은 아버지들, 아니 한국인들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 살아남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막강한 우방이자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은 거대한 자유와 풍요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 자수성가한 아버지에게 미국은 또 하나의 도전이자 약속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울에 올라와 열심히 살아가는 와중에 만났던 미국인들로부터 희망과 번영의 이미지를 읽었을 수도 있다. 그런 연유로 아버지는 막연하게 장차 미국에서 살게 될 거라고 믿고 살았던 것 같다. 덩달아 필자도 이담에 어른이 되면 미국에 살 거라고 생각하면서 컸다. 필자가 먼저 와서 아버지를 초청하는 것으로 순서는 바뀌었지만 생각이 현실화되어 우리는 미국에 살았다.

돌아가시기 2년 전까지 아버지는 매년 고국방문에 나섰다. 처음에는 선물을 잔뜩 사들고 씩씩하게 다니셨다. 노쇠하셔서 힘들어졌을 때는‘내가 이제 다녀오면 언제 또 가겠냐.’면서 해마다 고국을 찾았다. 고향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사촌형이 선산을 지키며 농사짓고 있었다.

13살에 집을 나와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쉬지 않고 고향을 찾았다. 명절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에도 빠짐없이 고향을 찾았다. 무엇이 아버지를 고향으로 부른 것일까. 지독한 가난과 가혹한 노동, 편협과 무지만이 존재했을 고향이 그리워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태어나 자란 곳을 떠나 타지를 떠돌며 인생을 쌓아가는 동안 변치 않는 존재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이 모두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번 떠난 고향은 멀어지고 잊히게 마련이다. 고향과 현실과의 거리가 멀고 단절이 심한 이민생활 속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고향을 잊어가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고향을 창조해내고 있다. 한국의 고향이 점점 낯선 곳, 머나 먼 기억 속의 장소와 시간으로 사라져가는 동안 이곳에서의 삶은 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까. 미국에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선배와 이야기 나누는 도중 내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선배는 "바쁜 사람 붙들고 내가 너무 혼자 떠들고 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보니 선배 댁에 온지 거의 3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이순신 장군을 도와 거북선 설계에 참여하고 제작에 크게 기여한 선배의 조상을 찾아보았다. 여러 사이트에서 선배 조상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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