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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02/05/24  

올해는 2월 10일이 설날이다. 큰딸이 한국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설날을 챙겼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딸과 대학까지 졸업하고 온 사위는 아이들에게 고운 한복을 입혀 우리집으로 와서 절도 하고 떡국도 함께 먹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렇게 지내지 못한다. 이곳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 후 집을 떠나 생활하는 작은 딸과 작은 아들에게 정월 풍습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어려서는 떡국 먹고 세배하는 것 정도는 시키니까 했는데 요즈음은 그냥 지나가는 경향이 있다. 어떤 해에는 자기들이 절을 하겠다고도 하지만 대부분 별다른 의식 없이 지냈다. 올해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딸은 여행 계획이 있고, 아들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중이다.

필자 어려서는 양력설(신정)과 음력설(구정), 두 개의 설이 있었다. 이른바 이중과세(二重過歲)를 했다. 양력설은 현재 일상력으로 사용하는 태양력에 의한 설이고,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 곧 설을 의미했다.

필자의 외가는 양력설을 쇠었고 친가는 음력설을 지내서 본의 아니게 해마다 이중과세를 했다. 양력설에는 외가 차례에 참여했고, 외가 어른들에게 세배했다. 그때 은행 다니던 외삼촌, 이모들이 빳빳한 새 돈을 쥐어 주었다. 음력설에는 큰집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세배하고 성묘를 다녔다. 그런 후에는 마을의 어른들 댁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절하고 음식을 대접받았다.
이런 시간을 통해 옛날에 있었던 집안끼리 얽힌 이야기들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그때 한 가지 알게 된 것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문씨 성을 가진 어르신 댁-그 집에 두 살 터울의 예쁜 자매가 있었다-에 인사드리러 가는 길에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문씨와 안씨가 혼인을 안 하게 된 사연에 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인 즉, 옛날 옛날에 문씨와 안씨 두 사람이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는데 어느 날 진짜 형제의 의를 맺으면서 우리는 형제니까 후손들끼리도 혼사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맹세를 했다는 것이다. 일 년에 한두 번-추석과 설날-그 예쁜 자매를 보고 싶어 어르신 댁에 가는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외가는 서울이라 버스 한 번 타면 갈 수 있으니까 큰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었지만 음력설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서울역에서 기차 타는 것부터 문제였다. 자리 잡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다. 간신히 자리 잡고 졸다 깨다 하면서 좀 가다 보면 예산역이다. 거기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청양 군청 소재지를 지나 사양면-지금은 남양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서 내려 20리 산길을 걸어야 했다. 고개 넘어 내려가면 큰집이 있었다. 차례를 지내고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조상 묘소를 찾아다니며 성묘했다. 20여 년 전에 선산을 마련해서 조상 묘소를 한군데 모셨지만 그때는 할아버지 할머니 외의 다른 증조부 고조부를 비롯한 다른 분들은 여기 저기 따로 모셔져 있었다. 그래서 성묘를 모두 마칠 때쯤에는 거의 파김치가 되다시피 했지만 자손의 도리를 다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설은 무엇보다도 한 해의 첫날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예전에는 신성한 날이라는 신앙적인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설은 ‘신성성(神聖性)’까지 부여하지는 못한다. 또한 설은 국가차원의 공휴일로 지정된 명절로 큰 의미를 갖게 되었지만 과거 우리 전통 사회에서처럼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설명절로의 위치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설은 몇 년 전부터 이곳 미국에서도 기념하는 명절이 됐다. 캘리포니아주는 지난 2022년 9월, 개빈 뉴섬 주지사가 음력설을 캘리포니아주의 공휴일로 인정하는 법안에 서명하며 공휴일로 지정했다. 지난해에는 뉴욕주, 콜로라도주, 아이오와주 등이 음력설을 주 공휴일로 지정했으며, 지난 12월 22일 78차 유엔총회에서는 음력설을 ‘유동 휴일’(floating holiday, 회사가 직원의 문화적 다양성, 일과 삶의 균형, 복지 등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보장해주는 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이 담긴 결의안을 채택해 음력설의 의미와 가치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는 현실이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이지만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의 전통 계승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떡국 먹기, 세배하기, 윷놀이처럼 어렵지 않게 지킬 수 있는 전통은 물론, 가능하다면 차례와 성묘도 자녀와 함께하며 자신의 뿌리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기회로 삼는다면 더 값진 설날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에 사는 한인 풍습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인회 같은 한인단체와 기관들이 우리의 전통 놀이, 문화 공연 등을 기획해서 설을 기념해 개최한다면 한인은 물론 타인종들도 함께 어울려 설의 의미를 되새기며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갑진년 새해, 여러분 모두에게 만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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