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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허당(虛堂)에서
12/26/23  

강화 허당(虛堂)에서 이틀을 즐겼다. 본래 허당은 친구의 아호(雅號)이다. 친구는 4년 전에 강화에 집을 장만하고 앞마당에 잔디를 깔고 나무를 심고 가꿨다. 나는 그의 강화 집도 그의 호와 같이 허당이라 불렀다.

친구는 자신을 빈집, 허당이라 칭하며 이 빈집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고 있다. 매일 아침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학원에서 외국어를 1시간, 다른 한 시간은 시사에 관해 학생들과 강사가 함께 토론하며 공부한다고 했다. 그 강의를 이틀이나 빠지면서 강화 허당으로 우리 부부를 초청했다.

올봄에 왔을 때 반겨주던 파란 잔디와 각종 꽃들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잔디는 하얀 눈에 덮혀 있었다. 잎이 무성했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한 채 휘몰아치는 삭풍을 견디고 있었다.

한낮 기온이 영화 15도,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는 그나마 바람이 없어 햇볕에 나서면 견딜만했다.

친구는 매서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강화의 이곳 저곳으로 안내하고 맛집으로 유명한 식당 등으로 안내했다.

북한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를 찾았고, 교동도의 대룡시장에도 들렸다. 두 곳 모두 방문객들이 많지 않았다. 심지어 대룡시장의 많은 업소들이 문조차 열지 않고 있었다. 날씨가 워낙 춥다 보니 업주들도 추운 날씨를 핑계 삼아 하루 쉬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청국장을 잘한다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다란 방직공장을 박물관, 미술관으로 꾸며 놓고 그 안에서 차와 빵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곳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냉면을 먹고 그리스 풍의 색채와 모습을 띤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돼지고기를 사다가 직접 수육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회도 떠다 먹고 매운탕 대신에 지리를 끓여먹었다.

이틀을 잘 보내고 친구 방에 누워 벽에 붙어 있는 수려한 필체의 글씨를 보다가 집주인 허당을 그대로 표현한 문구를 보았다.

발분망식 낙이망우(發憤忘食 樂以忘憂)
부지노지 장지운이(不知老之 將至云爾)
<논어 술이 18장>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식사하는 것조차 잊고 몰두하게 되고 깨달음을 즐기다 보면 나이 먹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근심걱정도 잊게 된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허당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빈집이라 여기고 평생을 배움의 자세로 임하며 하나하나 깨달음을 득하면서 즐기는 그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또 다른 벽에는 법구경 말씀이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心淨得念 無所貪樂(심정득념 무소탐락)
己度痴淵 如雁棄池 (기도치연 여안기지)
<법구경 7장 아라한품>
깊은 생각을 얻어 마음이 고요하니 탐하거나 즐거워 할 바 없어 기러기가 연못을 버리고 떠나듯 어리석고 깊은 수렁을 버리고 간다.

하나는 친구가 써줬다 하고 다른 하나는 선배가 선사했다고 하는데 모두 다 일관되게 허당의 삶의 자세와 인생관을 담고 있었다.

2023년을 떠나보내고 새해를 앞둔 연말에 친구집 허당에서 좋은 글을 만나 나의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을 다듬는 시간으로 삼았다.

친구가 자기 방에서 자라고 강권하다시피 하는 것을 마다하고 첫날은 마루에서 잤다. 둘째 날 친구는 자기 방에서 잘 것을 첫날보다 더 강하게 요청했다. 못 이겨 친구 방에 자리를 펴고 누워 자다 깨서 만난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말씀과 법구경 제7장 아라한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 내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2024년 갑진년 새해를 앞둔 세밑에 뜻있는 시간을 마련해준 친구에게 감사를 전하면서 아울러 독자 여러분께 만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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