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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모임
12/18/23  

한겨울에 고국을 찾았다. 이번 여행은 막내아들의 제의로 이루어졌다. 지난 7월 고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막내는 한국의 형과 누나, 조카들, 그리고 삼촌과 고모 등의 안부를 물었다. 모두 잘 있다고 대답을 했더니 아들은 "아빠만 해마다 한국 사는 가족들을 만난다. 우리는 한국 사는 형과 누나, 그리고 조카들을 만난 지 너무 오래됐다."며 “무언가 잘못되었다. 어떻게 가족이라고 하면서 7~8년 이상을 못 만나느냐? 삼촌과 고모 얼굴을 기억조차 못하는데 이게 무슨 가족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는 게 바빠서 어쩔 수 없다'며 온 가족의 재회를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는데 아들은 '잘못되었다'는 한마디로 이런 상황을 규정해 버렸다. 연이어 상황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아들에게 온 가족이 모이는 행사를 계획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즉석에서 이번 크리스마스에 모든 가족이 함께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막내는 서울 사는 큰딸과 통화해 동의를 얻어냈고,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작은 딸에게도 이런 사실을 알렸다. 우리는 12월 24일 서울에서 가족 재회행사를 열기로 했다.

2016년 여름 셋째와 넷째를 데리고 고국을 방문했을 때는 온 가족이 미국에 살았다. 그 후 큰아들과 큰딸이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어서 작은 딸과 작은 아들은 학업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난 모두가 바쁘게 살기에 단 한 번도 미국 사는 아이들이 고국에 사는 형제들과 만나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뿐만 아니라 작은딸과 작은아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기에 한국인이라는 의식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막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아들의 기숙사를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아들의 책상 위에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아들은 한국의 가수나 스포츠 선수들에 대해서도 나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쏟았고, 종목에 관계없이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의 동향을 꽤 차고 있었다.

아들에게 단 한 번도 '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고, '네가 한국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자기가 한국인이라고 느끼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인 정체성을 갖고 사는 작은 아들의 항의성 질의와 제안에서 시작한 가족 재회 행사는 서울 사는 큰딸과 미국의 두 아이가 부지런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작은 딸은 12월 23일, 작은 아들은 12월 17일 한국에 도착하는 일정이 잡혔고, 숙소를 찾고 여행지를 선정하는 등 아이들은 전 가족 재회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지난 7일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해가 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고 곧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 같이 우중충한 날씨였다. 그러나 마중 나온 친구의 함박웃음은 내 가슴을 따뜻하게 녹여주었고 포근한 조국을 느끼게 해주었다. 친구는 자신이 속한 단체의 연말행사에 불참하면서까지 나를 위해 마중 나와 주었다. 친구가 우리 부부를 숙소에 내려 주고 떠나자마자 큰딸 부부가 손녀와 손자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반가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큰딸네 가족은 우리와 함께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가 쉴 수 있도록 일찍 자리를 떴다.

한국 도착 다음 날부터는 매일매일 보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촌누나와 점심을 먹고 밀린 얘기를 나눴다. 하교하는 손자를 돌봐야한다며 누나는 시간 맞춰 떠났고, 오후에는 옛 직장 동료가 숙소로 찾아와 근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종로 3가 굴보쌈전문점에서 중고등학교 동창생들 9명을 만났다. 음식을 배불리 먹고 음식값을 내려고 하니 미국에서 온 친구가 왜 내려고 하냐며 자기들이 모아 놓은 돈이 있다며 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내가 2차를 사겠다고 했다. 친구들의 안내로 청계천을 지나 을지로를 걸었다. 한 30분 걸어서 도착한 골뱅이 집에서 한참을 이야기 나눴다. 동해시에서 올라온 친구는 열차 시간이 되었다며 먼저 떠났고, 다른 친구들은 끝까지 함께했다. 여기서도 나는 돈을 낼 수 없었다. 다른 친구가 나 몰래 이미 계산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동생들과 큰딸 부부와 함께 부모님이 계신 국립묘지도 찾아 참배했다. 또, 여수, 동해시 등지를 다녀왔다. 그리고 많은 선후배, 친구, 친척들...... 앞으로도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40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직도 한국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이어오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한국과의 인연이라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말고는 내세울 만한 것도, 떠오르는 것도 없다. 그런 만큼 ‘막내의 이번 한국 방문 제안은 단지 전 가족 모임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혹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그토록 자신의 뿌리인 한국을 그리워하게 한 것은 아닐까?’하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한동안 이어졌다. 그 답이 무엇이든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우리 가족에게 큰 의미가 있는 특별한 추억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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