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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탕 먹는 무채색 아이들
12/11/23  

감기에 걸린 셋째가 학교도 가지 못하고 누워서 입맛마저 없다고 하니 가엽기 짝이 없었다. 뭐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더니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돌더니 "마라탕?" 하며 귀엽게 웃는데 마라탕이 대수냐 한겨울 딸기(아 요즘은 딸기 제철이 겨울이지)라도 구해줘야지 싶었다. 난생처음 마라탕을 먹는다며 신나 하던 것도 잠시, 너무 매워서인지 조금밖에 먹지 못하고 남겨두었더니 기말고사 마치고 돌아온 중1 딸이 반갑게 맞이하며 후딱 한 그릇을 해치워버린다. 역시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집에서는 진라면 순한 맛도 겨우 먹으면서 마라탕은 괜찮단다. 

마라탕은 중국 쓰촨 지방에서 유래했는데 혀가 마비될 정도로 매운 국물에 다양한 식재료를 골라 넣고 끓여 먹는 음식이다. 몇 년 전 마라탕이 유행한다고 하여 남편과 둘이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식재료도 그다지 신선하지 않고, 딱히 제대로 요리를 하는 식당도 아닌 데다가 손님의 대부분이 여중생들이어서 적잖이 놀랐다. 주문한 음식을 다 먹지도 못하고 "아니 이걸 먹을 바에는 짬뽕이나 육개장 같은 게 훨씬 낫지 않나?" 하며 식당을 나섰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다시는 마라탕을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는데 딸이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우리 집에서도 "마라탕"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도진입적으로 나는 마라 요리가 별로다. 세상에는 다양한 매운맛이 있는데 마라의 식도를 치고 올라오는 얼얼하고 화한 맛, 혀를 마비시키며 맴도는 고통스러운 맛, 눈물 콧물 진땀까지 나게 하는 그 마라 맛이 괘씸해서 굳이 찾아 먹고 싶지 않다. 그런데 마라탕은 10대 여학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지지를 받으며 마라탕집이 우후죽순 생겨난 데다가 마라맛 라면, 마라맛 과자, 별의별 제품들까지 속출하기 시작했다. 마라의 매력은 대체 무엇일까?  맵기 선택은 물론 재료를 마음대로 골라먹을 수 있어서? 이국적인 독특한 마라 향? 감히 어린이는 넘볼 수 없는 맵부심(매운 것을 참고 잘 먹는 것을 과시할 때 사용하는 언어)? 그냥 유행이니까? 모르긴 몰라도 마라탕을 먹고 인생네컷 부스에서 사진을 찍고 코인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디저트로 탕후루를 먹는 10대들 속에 내 딸도 포함되어 있다.   

며칠 전 우리 딸 학교 기말고사 기간이라 학부모 시험감독 자격으로 학교를 방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내가 맡은 임무였다. 최대한 아무 기척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정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두 시간 동안 가만히 바라본 아이들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똑같이 입는 게 당연한 교복을 제외하고도 재킷, 책가방, 머리모양 모든 것이 비슷했다. 교실 안은 온통 블랙, 화이트 그레이. 색상과 채도가 없고 명도의 차이만 존재했다. '세상에 예쁜 컬러가 얼마나 많은데 왜 굳이......'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핑크를 유난히 좋아하던 딸이 6학년이 되었을 때 "너도 중학교 가면 검은색만 좋아하겠지?" 했더니 절대 아니라고 펄쩍 뛰며 자기는 평생 핑크를 좋아할 거라고 했었다. 그러나 6학년이 다 끝나기 전부터 서서히 시작되더니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정말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채색만 찾기 시작했다. 핑크색을 좋아하는 딸을 생각해서 아빠가 해외 출장 갔다가 사온 핑크색 아디다스 운동화는 딸 대신 내 차지가 되었다. 딸에게 핑크 운동화를 왜 신지 않냐고 물었더니 "너무 튀는 건 별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몇 달 전 본인이 직접 고른 밝은 컬러의 옷들은 모두 장롱에 처박아두고 회색 후드집업과 검은색 패딩만 주야장천 입고 다닌다. 

나는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서 그런가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은 우리나라 10대들이 생소하다. 하나같이 획일적으로 무채색 옷만 입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무거워진다. 특색이 없고 지루하고 무기력하게만 느껴진다. 미국에서도 사춘기에 접어들면 알록달록 총천연색을 좋아하던 아이도 솜사탕 같은 파스텔색만 좋아하던 아이도 취향이 바뀌는 경우가 제법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처럼 모두가 하나같이 한순간에 무채색으로 돌변하지는 않는다. 무채색이 아닌 다른 색의 아이를 이상하게 보거나 손가락질하지도 않는다. 

10대들의 마라탕 유행은 언제쯤 사그라들까? 맵찔이도 어쩔 수 없이 친구 따라 마라탕을 먹어야 하는 무채색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다들 부디 자기 색을 찾아가길 바란다. 유행이니까, 남들 다 그러니까, 튀고 싶지 않으니까…... 그 안에 조용히 묻혀서 살아간다면 너무 늦게 진짜 나 자신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영영 만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핑크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나의 딸이 아무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교복에 핑크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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