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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버터
12/11/23  

12월에 들어선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중순이다. 백화점들의 장식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한 지 오래 되었고 라디오에서도 크리스마스 캐럴이 하루 종일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연말연시 분위기에도 한인들의 한국 정치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얼마 전 한 식당에서 어르신 몇 분을 모시고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한국 정치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식사를 하던 어르신들은 정치와 관련된 대화는 하지 않는 터였지면 들려오는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신문이나 라디오, TV 등을 비롯해 유튜버들이 하는 얘기를 옮기고 있었다. 가끔 서로 언성을 높이며 토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목소리 큰 한 사람이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고 있었다. 들려오는 한국 정치이야기에 문득 ‘빵 장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마을에 빵 장수가 살았다. 그는 이웃에 사는 농부에게 매일 아침 버터를 샀다. 어느 날 농부가 가져온 버터가 정량보다 조금 모자라 보였다. 빵 장수는 그날부터 며칠 동안 농부가 가져온 버터를 저울로 일일이 달아보았다. 예측한 대로 모두 정량 미달이었다. 화가 난 빵 장수는 버터를 공급하던 농부를 법정에 고발했다.

재판관은 농부의 진술을 듣고 놀랐다. 농부의 집에는 저울이 없었다. 그는 빵 장수가 만들어 놓은 1파운드짜리 빵의 무게에 맞추어 버터를 자르고 포장해 납품했다. 빵 장수가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서 1파운드짜리 빵의 규격과 양을 조금 줄였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농부는 줄여서 만들어진 빵에 맞추어서 버터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그 버터가 함량 미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농부가 버터를 만드는 기준으로 삼은 것은 빵 장수가 만든 빵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금의 한국 정치도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함량 미달의 빵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쪽을 살펴봐도 규격에 맞는 버터를 만들어낼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다. 국민을 위한 정치, 나라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내다보면서 정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이나 정부의 각료들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의 안위와 정치적 이득을 계산하며 입을 열고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혁신이 필요한 때이다.

혁신이란 낡은 것을 바꾸거나 고쳐서 아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즉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 관습, 조직, 방법 등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혁신이다. 그 혁신을 하겠다고 나섰던 한국의 야당과 여당의 현재 모습은 어떤가?

민주당은 지난 6월 중순에 한국외국어대학교 김은경 교수를 혁신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혁신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노인 폄하’ 발언과 그 후 혁신위원장의 가족사까지 밝혀지면서, 혁신위원장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국민들은 ‘아무리 좋은 내용의 혁신안을 만들어도 흠결 있는 사람이 만든 건 권위가 안 선다. 흠결 있는 사람이 어떻게 혁신을 얘기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혁신안은 존중받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두 달여 만에 혁신위 활동은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혁신위가 주장한 ‘불체포특권 포기안’은 합당한 결정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당내 집권 세력에 의해 제동이 걸리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여당도 마찬가지다. 지난 10월 23일 연세대학교 인요한 의대교수를 혁신위원장으로 영입했다. 당시 큰 기대를 가졌던 국민들은 혁신위 발족 두어 달이 지났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는 혁신위에 큰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 혁신위원장은 당내 기존 세력에게 희생을 요구했다. 하지만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는 당 내 분위기를 간파한 인 위원장은 ‘희생안을 수용하지 않을 거면 자신을 공천관리위원장에 추천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혁신위가 의결한 인적쇄신 요구가 당 최고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이처럼 여당, 야당 모두 혁신위 활동은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그동안 혁신안이 없어서 혁신을 못 했던 게 아니다. 혁신에 대해 수백 수천의 참신한 안들이 이미 나와 있지만, 기득권 세력들이 이를 거부한 탓에 혁신다운 혁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여야 할 것 없이 양당 혁신위원회는 당 내 불협화음이 일더라도 기득권 세력들과 승부를 벌였어야 했다. 그리하여 ‘내로남불’과 ‘온정주의’, ‘계파간의 결속’ 등에 실망해서 당을 떠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참신한 신인들이 몰려 들어오는 계기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결실을 맺기는커녕 오히려 일부 소외 세력들이 당을 떠나는 계기를 만들어 준 느낌이 없지 않다.

환골탈태(換骨奪胎)하지 않고 혁신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인들이 나의 손익을 계산하기보다 국민의 안녕과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자세로 2023년의 대미를 장식하고 대망의 2024년을 맞이하기를 기원한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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