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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10/23/23  

안개가 제법 껴 앞이 희미하게 보이던 어느 날 아침, 바다로 소풍을 나갔다. 그냥 바다로 간 것이 아니고 RV(Recreational Vehicle)를 타고 갔다. RV 주인 부부가 아침, 점심을 준비했으니까 몸만 오면 된다며 초대했다. 차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안주인이 아침 식사대용이라며 김밥을 꺼내 놓았다. 정성이 가득 담긴 맛있는 김밥이다. 먹고 또 먹었다.

1시간 남짓 남쪽으로 내려와 한 해변에 차를 세웠다. 역시 안개로 100미터 전방의 사물을 선명하게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 물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지만 선명하지 않았다. 가끔 바람에 안개가 걷히면 잘 보였다가 또 얼마 후에는 희미해지기도 했다. 주차장 바로 앞에 백사장이 좌우로 넓게 펼쳐져 있다. 집채보다 더 높게 파도가 출렁이고 있었다. 그래도 몇몇 젊은이들은 바다에 몸을 담그고 파도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차를 주차하고 차 주인 내외는 부지런히 차 안 구석구석에서 의자, Shade(차양遮陽) 등을 꺼내 설치하기 시작했다. 등받이까지 갖춰진 의자를 사람 수(6)만큼 펴놓고 셰이드를 치더니 음식을 꺼내고 점심 식사 준비를 했다. 오는 차 안에서 김밥을 배부르게 먹었기에 더 먹을 수 있을까 했지만 잘 익은 두툼한 패티에 치즈와 토마토, 양상추가 들어간 버거를 어찌 마다할 수 있는가? 치즈를 하나 더 넣어서 먹었다. 하나가 부족하다고 느껴져 하나를 더 먹었다.

배불리 먹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일명 ‘멍때리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닷가에도 가을이 와있었다. 한 여름의 강렬한 태양이 지배하던 바다가 아니었다. 그늘 속에 있기보다는 햇볕을 직접 받는 편이 더 좋았다. 안개는 걷히는 듯하다가 또 다시 내려앉았고,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더 가까이 기울어져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았고,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좋았다. 나이도 성별도 다 잊고 그냥 편안함 자체를 즐겼다. 스르르 눈이 감기면 졸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얘기하면 귀를 열기도 하면서 오후의 나른함 속에 빠져 들었다.

문득 영화 <소풍>(감독 김용균)이 떠오른다. <소풍>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파노라마 부분’에 공식 초청되어 월드프리미어로 첫선을 보인 작품이다. 아직 시중에 개봉되지 않은 영화 '소풍'은 상처입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던 한 여인이 60여 년 만에 고향을 찾으면서 시작한다. 그는 자신과 달리 아무 일 없이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옛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안해진 주인공은 생각한다. ‘80이라는 나이는 삶보다 죽음이 훨씬 가까운 나이이다.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잘 살았다 싶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옛 친구들을 만나면서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주인공과 친구들은 각자 홀로 감당해 온 지난 세월이 서로 다르지만, 이들의 시선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과거에 풀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지도 않는다. 오직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로 향한다. 자존감을 잃지 않고, 자기 자신 그대로 살고 싶어 하는 당당한 젊은 노인들의 소풍은 그렇게 이어진다. 영화 속 인물들 못지않게 연륜이 쌓인 배우들의 소탈하고 소박한 연기가 어우러져 한바탕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을 보면서 흐뭇한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극중에서 나와 지금 바닷가에 함께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어린 시절이라도 함께했지만, 우리는 고향도 다르고 성장 과정도 전혀 다르다. 더군다나 나이 차이도 10여 살 이상 난다. 그럼에도 객지에서 만나 나이나 성별을 잊고 함께 어울려 식사하고 차 마시고, 소풍을 간다.

그 어떤 얘기를 해도 좋다. 서로 거슬리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의아하다.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는 서로 아무 말 하지 않고 함께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게 된다.

나는 작은 바람에도 흩어질/나는 가벼운 모래 알갱이/그대 이 모래에 작은 발걸음을 내어요/깊게 패이지 않은 만큼 가볍게......
임영웅이 작사 작곡하고 직접 부른 영화 <소풍>의 OST, '모래 알갱이'의 시적인 가사를 읊으며 잠시 백사장을 조심스럽게 걷다 돌아왔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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