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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남조
10/16/23  

“나는 근본적으로 삶을 긍정합니다. 일제강점기, 광복,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듯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사는 것 자체가 의미 있고 행복한 일 아니겠어요. 한여름의 땡볕은 고통스럽지만 곡식을 익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2013년 언론 인터뷰)

지난 10일, “사는 것 자체가 의미 있고 행복한 일”이라던 김남조 시인이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타운뉴스 필자의 방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다음 주 칼럼을 쓰고 있었다. 쓰던 글을 멈추고 책꽂이에 꽂혀 있는 金南祚라고 그의 이름이 한자로 크게-책 제목(저희는 홀로입니다)보다 더 크게- 찍혀 있는 책을 펼쳐 들었다. 작가 이름과 제목 사이에 김남조의 사랑과 진실과 만남의 명상록이라고 쓰여 있다. 1984년 초판이 발행되었고, 필자의 책은 1985년 중판된 것이었다. 그 책의 ‘사랑은’이라는 글에서 그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랑은 생소한 손님도 아니면서 막상 그 참 얼굴을 보았는지의 질문 앞에 설 땐 그만 아찔했다.’ 시인은 ‘사랑하기 위해 선택한 사람을 사랑함은 심히 안일한 노릇’이라면서 ‘인간은 사랑의 깊이와 넓이도 훨씬 진화되어야 한다’고 했다. ‘선택한 특정인 외에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며, 나아가 삼라(森羅)의 모든 것을 축복과 연민으로 껴안을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글의 말미에 ‘하긴 사랑은 최면일 수가 있고 사막의 모랫벌에 불의 천의(天衣) 자락이 너울대는 그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름의 그것이 사는 대륙을 향해 머나먼 여로를 가려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사실 김남조의 모든 시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의 시인’이라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6·25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시인은 ‘어느 산야에고 구르는 돌멩이처럼 목숨만 갖고 싶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70년이 흘러 아흔 세 살에 스무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내가 불 피웠고/나그네 한 사람이 와서/삭풍의 추위를 벗고 옆에 앉으니/내 마음 충만하고/영광스럽기까지 했다/이대로 한평생이어도/좋을 일이었다’. ‘나그네’라는 이 시에는 인생의 굴곡을 거치면서 갖게 된 삶의 깨달음과 사색이 짙게 담겨 있다.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참화 앞에서 시인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에게 기도해달라고 간구한다. ‘이제는/신께서 기도해주십시오/기도를 받아오신 분의/영험한 첫 기도를/사람의 기도가 저물어가는 여기에/깃발 내리듯 드리워주십시오’(‘신의 기도’ 중) 시인의 세례명은 마리아 막달레나.

그는 2013년 17번째로 펴낸 시집, ‘심장이 아프다’에서 “노년의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숨 쉬는 일이 위대하고 가슴 벅차게 느껴진다”며 “80년을 살고 나니 생명의 갸륵함을 느낀다. 그러니까 주어진 시기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했다.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난 시인은 일본 규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쳤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48년 대학 재학시절 ‘연합신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내디뎠지만 시인 자신은 첫 시집 ‘목숨’(1953년)을 문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목숨’은 6·25전쟁 당시 부산 피난 시절에 펴낸 책이다.

이후 시집 ‘정념의 기’(1960년), ‘풍림의 음악’(1963년),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5년) 등을 발간하며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줬다. 모윤숙, 노천명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여성 시인의 계보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굴곡진 시대적 상황, 화려한 경제 발전의 이면에 흐르는 땀과 눈물을 시인은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글로 남기려고 노력했다. 후기에 들어서는 생명의 은총을 깊이 묵상했다. 초기작품들에 드러난 인간성에 대한 확신과 왕성한 생명력을 통한 정열의 구현을 거쳐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강조했으며,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화된 신앙의 경지를 보여줬다.

쓸쓸히/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이적지 못 가져 본/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나 살거니/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이미 준 것은/잊어버리고/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나의 사람아(‘너를 위하여’ 중)

김남조 시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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