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홈으로 나는야 1.5세 아줌마
가을 운동회
10/09/23  

아이들 학교에서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원래 2년에 한 번씩 열려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번에는 5년 만이라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갔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런 학교 행사들이 모두 중단되었었다는 것이다. 한동안 입학식과 졸업식은 모두 취소되거나 간소화되었고 소풍과 수련회, 운동회, 학예회 등도 사라졌다. 아이들은 마스크를 착용한 채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었고 학교 수업이 비대면 영상수업으로 대체되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5년 만에 열린 가을 운동회는 모두에게 조금 더 많이 특별했을 것이다.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팬데믹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실감이 들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 학교는 운동장이 작아서 전교생이 한 번에 운동회를 진행할 수 없어 저학년은 오전, 고학년은 오후 2부로 나뉘어 행사가 진행되었다. 나는 막내가 3학년이고 셋째가 6학년이라 하루 종일 학교에 있어야만 했다. 하필 전날 살짝 무리를 한 탓에 몸이 으슬으슬 춥고 정신이 멍하고 미열도 있었지만 가을 운동회만은 포기할 수 없어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펄럭이는 만국기를 보고 있으니 나의 운동회가 떠올랐다. 나도 이 학교, 이 운동장에서 운동회를 했었으니깐. 우리 시절 가을 운동회에 대한 기억들을 꺼내보자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그때 청군이었는지 백군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목숨을 걸고 사력을 다했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연중 가장 큰 행사나 다름이 없어서 연습 과정도 길고 참여하는 종목도 참 다양했다. 학교와 교사가 주도적으로 운동회를 계획하고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가 함께 즐기는 잔치쯤으로 여기기도 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우리 엄마는 내 운동회에 두 번밖에 오지 않으셨다. 전업주부셨던 엄마에게 더 급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엄마는 오지 않으셨고 나는 또 당연한 듯 받아들였던 것 같다. 다만 그 시절 운동회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 것만은 아쉽게 생각한다.  

오늘 날씨는 가을 운동회에 딱 맞는 그야말로 가을 운동회를 위한 날씨였다. 유난히 높고 청명한 하늘 아래에 만국기는 힘차게 펄럭이고 학년티를 입고 모여 있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신이 나있었다. 평소 학원 가느라 길거리에서 마주치던 축 처진 어깨에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진정으로 축제를 즐기는 듯 즐거워 보였다. 계주 선수들의 결의에 찬 눈빛과 꽉 다문 야무진 입술은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고래고래 "청팀 이겨라!" "백팀 이겨라!" 소리치는 아이들은 이기고 지는 승부 따위는 이미 초월한 것 같기도 했다.

외부 행사대행업체에서 전문 MC와 진행요원들이 행사를 진행하니 선생님들도 편하고 모든 것이 매끄러웠다. 노련한 MC는 아이들의 승패와 상관없이 응원 점수, 매너 점수 등을 후하게 주어 청백팀의 점수를 엎치락뒤치락하며 아이들을 환호하게 했다. 나는 운동회 때마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늘 쓰디쓴 고배를 마시느라 1, 2, 3등만 받는다는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받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우리 아이들은 모두 엄마보다 훨씬 잘 뛰었다. 아이들은 연신 내 쪽을 보면서 손을 흔들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오래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특히 6년 전 셋째가 처음 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 운동장을 밟았었는데 어느새 최고 학년이 되어 제 세상인 양 운동장을 누비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기도 했다. 운동회 마치고 셋째가 바로 전화를 했길래 "오오~ 달리기 1등! 너무 잘 달리던데?" 했더니 아이의 목소리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우쭐함이 느껴졌다. 

아침부터 힘차게 펄럭이던 만국기와 아이들의 뜨거운 열정에 압도당해 감기 기운마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 2023년 10월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내 어릴 적 운동회와는 사뭇 달랐지만 목이 터져라 우리 팀을 응원하던 나와 유난히 파랗던 하늘만은 변함이 없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