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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날
10/09/23  

친구랑 빅베어에 가기로 했다. 한동안 빅베어에서 무엇을 할까? 밥은 사먹을까? 지어 먹을까? 무엇을 하고 지낼 것인가? 계획하면서 즐겼다. 친구도 산속에서 지내다 온다는 사실에 가슴 부풀어 했다. 더군다나 친구는 부인이 고국방문 길에 나선지라 혼자 지내야 하는데 1박2일을 산속에서 즐길 수 있음을 신나 했다. 산길에 승용차보다 SUV가 좋다며 친구가 나를 태우러 우리집으로 왔다.

목적지까지 가는 1시간가량은 프리웨이를 달리고 나머지 1시간 정도는 구불구불 산길이라 산길 운전 경험이 많은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빅베어 호수의 거의 끝자락에 자리했다. 오후 2시, 체크인 가능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이르게 숙소에 도착했지만 접수창구 직원들은 친절하게 입실 수속을 도와주었다.

친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히터를 틀었다. 75도에 맞춘다고 했다. 히터 소리가 요란했으나 추운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아 참고 견디기로 했다. 짐을 풀고 자쿠지를 하기로 했다. 이미 자쿠지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백인 부부와 그들의 아들, 손자, 손녀인 듯했다. 그들은 이방인, 그것도 동양인들이 들어서니 주춤하는 듯했다. 캘리포니아 사람들 같으면 동양인을 봐도 별로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는데 그들은 캘리포니아 주민이 아닌 듯했다. 나는 아들로 보이는 사람과 눈인사를 나눴다. 다른 사람들은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20 분쯤 지났을 때 친구가 먼저 샤워를 하겠다며 일어섰다. 나만 남겨졌다.

그때 내가 아들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켄터키에서 왔다며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네는 여기서 2박을 하고 산타모니카로 가서 다시 두 밤을 자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밴으로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내게 어디 사냐고 물었고 여기 자주 오냐고 물었다. 내가 사는 동네를 알려주고 예전에는 자주 왔는데 아이들이 크고 난 뒤에는 가끔 온다고 하자 혹시 이곳에 추천할 만한 식당이 있냐고 물었다. 우리 동네는 내가 잘 아는데 이곳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잠시 즐기다가 떠났다. 나는 조금 더 자쿠지에 몸을 담그고 있다 허기를 느끼고 숙소로 향했다.

저녁에는 김치찌개를 끓이고 친구가 준비해 온 불고기를 프라이팬에다 넣고 볶았다. 식사를 하면서 한참을 웃고 즐기다가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깨끗이 하고 TV 앞에 앉았다. 깨끗이 닦아 온 포도와 먹기 좋게 잘 깎아 놓은 배를 먹으며 TV를 즐겼다.

평소에 9시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습관이 된지라 9시가 넘어서부터 졸음이 오기 시작했으나 친구와 함께하는 숲속의 밤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졸음을 참아가며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10시 조금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친구가 틀어 놓은 히터 소리가 요란했으나 곧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이 떠졌다. 4시였다. 너무 일찍 일어나는 것 같아 잠을 청해보았으나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져 침대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아 어제 갖고 온 몇몇 한인 신문을 펼쳐 들었다. 하루 늦게 보는 신문이다. 모두 비슷비슷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친구와 밖으로 나왔다. 숲에는 어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숙소 앞 비포장 길을 걸어 산 쪽으로 오르다 다운타운을 향했다. 다운타운은 적막한 가운데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온을 보니 화씨 42도(섭씨 5.55도). 손과 귀가 시려왔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 보온용 옷을 충분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두꺼운 옷을 챙겨 오지 못 한 것을 후회했다. 그나마 친구는 두꺼운 파커를 챙겨와 다행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사랑의 행복, 행복이 달아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 감사, 헌사의 마음이 담긴 곡으로 세상이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물드는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이다.

본래 노르웨이 작곡가와 아일랜드 바이올리니스트, 2명으로 구성된 Secret Garden의 ‘Serenade to spring’이라는 연주곡에 한경혜 씨가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제목과 우리말 가사를 붙였다. 원곡은 봄을 노래한 곡인데 우리에게는 가을 노래로 기억되는 게 재미있다. 이 노래를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가을에 들으면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해진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어느새 사위(四圍)가 밝아져 있었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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