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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지정(師弟之情)
09/11/23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제자들이 필자의 생일상을 차리겠다고 했다. 식당에서 모이기에는 많은 인원이라 한 졸업생 자택에서 하기로 했다며 2달 전에 통보해주었다. 1회 졸업생들이 주최했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1, 2, 3, 4회 졸업생들과 내가 교단을 떠난 한참 뒤에 입학한 16기 졸업생도 참석해서 축하해주었다.

대문에 생일 축하 사인이 붙어 있었고, 처마 밑에는 ‘HAPPY BIRTHDAY'라고 플래카드가 달려 있었다. 뒤뜰에는 커다란 테이블 몇 개가 펼쳐져 있었고 포토 존이 두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생일을 기념하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동창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언제나 제자들을 만나면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웃으며 즐겁게 대화하며 수업이나 생활지도를 하지 못하고 위압감을 느끼게 하고 공포심을 갖게 하며 교육이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았나 싶다. 오로지 대학 입시만을 목표로 하고 오로지 공부, 공부, 모든 것을 학업 성적으로 평가하고 심지어 인성(人性) 마저도 성적에 의해 평가하지 않았는지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프다. 교사와 학부모는 물론 학생들도 성적에 의해 서열을 정했다. 이런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보니 학업만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인격적인 모멸감을 느끼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학교는 교사들도 평가했다. 담임 맡은 학급 학생들의 학업 성적과 수업료 납부실적 등을 점수화 했다. 또 고3 담임들의 평가에서는 자기가 맡은 학급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대학에 합격했는가를 매우 중요시 했다. 서울대는 7점, 연고대는 5점, 서울의 일반대학은 3점, 지방대학은 2점, 뭐 이런 식으로 평가해서 점수를 매겼다. 학교가 교사들끼리도 경쟁을 하도록 시킨 것이다.

그때는 그랬다라고 그 시대를 운운하며 핑계를 대어서는 곤란하다. 정말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함께 식사를 하던 중 한 친구가 말했다. 머리가 길다고 내가 바리캉(이발기계)으로 자신의 머리를 밀었다고 했다. 정말 생각이 안 난다. 다른 선생님들이 그러는 것을 본 기억은 나는데 내가 그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한 여학생이 말했다.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데 선생님들이 들어와서 야간자율학습 시간이 다 되었다며 빨리 들어가라고 독촉해서 먹다말고 허둥지둥 학교로 들어갔다고 했다. 전혀 기억에 없어 내가 그랬냐고 물었다. 다행히 나는 아니라고 했다. 난 학교 근처의 식당이나 당구장에는 가지를 않았다. 오히려 피해 다녔다. 혹시라도 마주친 학생들이 불편해 할까봐.

주최하는 제자가 내게 친구들을 몇 분 초대해도 좋다고 해서 중학교 동창생 2명과 초등학교 동창생 1명, 그리고 22년 전에 미국에서 만나 요즈음 매일 걷고 체조를 함께 하는 친구를 초대하고 싶다고 하니 그들에게 직접 초대장을 보내서 친구들이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친구들과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게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한 제자가 내 테이블에 양주를 한 병 갖다 놓았다. 친구 4명 중 목사가 한 명, 장로가 두 명이다 보니 술 먹을 사람이 없었다. 또 운전도 해야 하고. 내가 조금 마시고 제자들 테이블에 갖다 놓았다. 흥이 무르익을 무렵, 준비한 케이크를 놓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선물 증정식이 있었다. 남가주 미술가 협회 회장을 지낸 제자가 자신의 그림을 선물했고, 제자들이 내 이름이 새겨진 커팅보드(도마)를 두 개 선물했다. 와인과 상품권, 화분. 등등의 선물 전달이 있었고 이어서 제자들이 손수 친필로 쓴 카드를 건네주었다. 그 카드에 쓰인 글을 그 자리에서 하나하나 낭독했다.

예상대로 내 별명이 등장했다. ‘안착해’, 학창시절 제자들은 내 이름자의 중간자 받침 ㅇ을 ㄱ으로 바꿔 불렀다. 성을 빼고 불러달라고 사정했으나 모두 성을 붙여서 부르기를 즐겼다.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밤이 깊었다.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제자들만 남았다. 제자들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제자들은 은행 지점장, 공인회계사, 대학교수, 화가, 목사가 두 사람, 공인중개사, 개인사업 등등 갖가지 직업을 갖고 열심히 살고 있었다.

우린 또 웃고 얘기하며 옛이야기 꽃을 피웠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 하며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성인이 된 학생들과 만나 옛날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몰랐다. 그것도 고국이 아니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말이다.

모교 교훈을 알고 있느냐고 물으니 모두 힘차게 외쳤다. ‘Koreans branching out around the world.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인이 되자.’ 교훈대로 해외로 나와 높고 큰 목표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는 그들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했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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