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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평(奇平) 손영락 화백
07/17/23  

옛 친구 기평(奇平) 손영락 화백이 만나자고 했다. 내가 바쁘면 자기가 나 있는 곳 근처로 오겠다고 했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내가 가야지. 기평이 사는 의정부에서 만났다. 비가 제법 쏟아지던 날이다. 역 앞의 백화점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차도 마셨다.

손 화백은 젊은 날, 아호(雅號)를 현강(玄江)이라고 했다. 때문에 기평의 이삼십 대 때 그린 초기 작품에는 奇平 대신에 玄江이라고 쓰여 있다. 현강은 검은 강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다소 어둡다. 기평(奇平)은 기이한 평형이라는 뜻으로 그의 몸이 불편함을 암시하고 있지만 현강보다는 좋게 느껴진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당당히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강렬함이 담겨 있어 훨씬 느낌이 좋다.

기평은 작별인사를 하면서 내게 그림을 한 점 주었다. ‘2001년 LA에서 전시회를 하도록 주선해줘서 고마웠는데 그 인사를 이제야 한다’고 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당시 난 그저 전시회를 전문으로 하는 갤러리 대표에게 미국에서 기평이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그의 그림을 보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대표가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라디오코리아 도산홀에서 기평의 개인전이 열렸었다. 내가 그의 미국 전시회를 위해 내세울 만큼 기여한 바가 없었다. 경위야 어떻든 그 전시회를 기점으로 기평은 화단에 이름을 알리게 됐고, 그는 아직도 그때 일을 고마워하고 있다.

기평은 그림을 장거리 이동하기 좋게 단단히 포장했기에 뜯지 않고 미국까지 그대로 들고 왔다. 이제 막 포장을 풀고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15~6 년 전에 LA의 모 대학 학장실에서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담은 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그 학장님은 내가 기평의 친구인 줄 모르고 좋은 그림이라고, 아니 비싸게 산 그림이라고 가격까지 입에 올리며 기평의 그림을 칭송했었다.

우리 집에는 기평의 작품이 여러 점 있다. 이미 표구한 그림도 있고, 아직 종이 상태로 장롱 깊숙이 보관 중인 작품도 있다. 대나무 그림이 몇 점 있고, 국화와 매화, 그리고 창공을 날아 바다를 건너는 독수리도 있다. 특히 독수리 그림은 내가 미국행을 결심했을 때 내게 용기를 내라고 그려준 나만을 위한 그림이다. 이 독수리는 표구해서 잘 모셔 놓았다. 대부분 기평의 젊은 날 그림이다.

산 그림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게 주려고 마음먹고 그린 최근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것도 어릴 적 오르내리던 바로 그 산이다. 그 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 두 개. 백운대와 인수봉. 그 밑의 백운산장에는 밤낮으로 드나들었다. 특히 대학시절에는 그 산장에서 밤새 술을 퍼마시기도 했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과 평생 같이 살 것처럼 어울리곤 했었다. 모두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기평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정(靜, 고요)과 요(搖, 흔들림)가 잘 어울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참 좋다! 과거의 그의 그림은 어두운 기운이 지배적이었다. 우울했다. 그러나 두 봉우리가 우뚝 서있고 봉우리 허리 부분을 구름이 감싸고 있는 그림에는 활기가 느껴졌다. 한 마디로 정중동(靜中動)을 느끼게 된다. 나도 모르게 편안해진다. 인간의 7정(七情,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게 된다.

게으른 나를 위해 표구까지 해서 준 이번 그림은 정말 기가 막히다. 해발 800미터 조금 넘을 뿐인 봉우리가 정말 잘 생겼다. 백운대가 837미터, 인수봉이 811미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히말라야의 그 어떤 봉우리 못지않게 아름답다. 높이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에베레스트(8,848.86m), 안나푸르나 제1봉(8,091m) 등과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한국 산의 아름다움에 자부심도 느껴진다.

특히 기평의 구름이 허리를 감고 있는 백운대와 인수봉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천지만물의 근원이 되는 기운, 정기(精氣)를 가득 차게 해준다. 또, 그의 그림에서 그의 안정된 삶이 느껴져서 참 좋다.

삶을 대하는 기평의 투철한 노력은 가히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이 된다. 작품 활동을 향한 불굴의 의지와 삶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이룬 그만의 작품 세계. 치열한 삶에 지쳐 느슨해지려는 사람들에게 그의 그림은 채찍이자 회복제가 아닐 수 없다.
기평 손영락 화백의 앞날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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